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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안면 펀치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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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문화 및 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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펀치볼 (해안) 사람들이 살아온 길


1) 펀치볼 도로의 옛 추억

해안은 1956년 주민이 1차 입주한 이례 제 4차에 걸쳐 입주시켜 살게 된 곳입니다. 처음에는 민간이 이용하는 차량이 없어 군인 진중버스로 1일 1회 왕복운행하다 두 번이나 진중버스가 굴러 2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이후 민간인 화물차로 다니다가 1970년도부터 지금의 버스로 교체 되었습니다. 당시 도로는 비포장 도로 로 눈, 비만 오면 도로가 파이고 결빙되어 2~3일간 두절되는 사례가 허다하였으며 급한 용무가 있는 사람은 비사도로를 이용하여 인제군 서화까지 걸어서 일을 보고 돌아오기도 하였습니다.
장마철이나 겨울철에는 버스를 타고 해안으로 오다 힘이 없어 정지하게 되면 노약자는 차에 남고 부녀자와 어린이는 차에서 내려 걸어가고 젊은 청, 장년은 버스 뒤에서 밀고 가는 진풍경이1980년대 말까지 이용되었다. 1990년대 이후 도로 포장이 완공되어 현재는 편안하게 다니고 있습니다.


2) 해안 출입증 발급

해안주민은 만 18세가 되면 누구나 의무적으로 출입증을 발급받아 인제지역 이나 양구지역으로 통행을 할 수가 있었다 출입증이 없으며 타 지역을 나 갈수가 없으며 2년 마다출입증을 갱신하였다. 타 지역인 이 이곳에 올 때는 본적지 동, 면사무소에 가서 신원 증명서를 발급받아 기무부대(보안부대)를 경유 사단 사령부에서 임시 출입증을 발급받아 해안에 올수가 있었으며 출입기간은 2~3일 정도로 제안되며 이를 위반하면 그에 따른 벌칙을 받기도 했습니다.
또한 해안에 오면 유숙제 (방문신고서)를 작성 이장을 경유하여 파출소 및 기무대에 제출하였습니다. 이곳 출입시 3개 부대에서 검문을 실시하였고 차량 승차 인원이 많으면 검문만 1시간이상 소요되어 엄청 불편했습니다. 1980년 이후 부터는 해안주민만 주민등록증만으로 통하다 1990년 이후에 출입제도가 완전히 해제되어 현재는 자유롭게 출입하고 있습니다. 외지 주민이 이곳에 정착하기 위해 입주를 신청 할 때는 6개월 전에 해야 하고 가족 중에 향토예비군이 있어야 하며 신원 조회상 교통법규 위반자도 입주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곳주민은 국가관과 안보의식이 타 지역 사람들보다 투철 합니다.



3)군부대에서 주민통제

야간 일몰이 되면 등화관제를 실시하여 불빛이 밖으로 세어 나가지 못하게 하였으며 영농한계선을 설정하여 밖으로 못나가게 출입통제를 하였고 초소를 통과 할때는 일출이 되어야 일터로 나 갈수 있으며 일몰전에 귀가해야 했습니다. 이곳에서 타 지역 (양구,인제)으로 출입할 때도 일정시간이 경과하면 출입 할수 없었으며 급한 환자가 발생할 경우에도 출입에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특히 농산물 출하할 때 시간이 경과 되어 출하를 못해 농산물이 변질되어 손해를 보는 일이 허다 하였습니다. 군부대에서 정해놓은 규칙과 군사시설 보호법에 위배되는 행동을 했을 때는 군부대에 가서 노역도 하고 벌도 받으며 힘들게 살아왔습니다. 시간이 가고 세월이 가다보니 이런 것들이 사라지고 지금은 하나의 추억으로 간직하게 되었습니다.



4)멧멧제 (비상도로) 령의 사랑이야기

해안마을에 70년대 초까지 군인들이 많이 주든 하고 있어 이곳 여성들은 불편한 이곳을 탈출하여 보다 자유로운 곳으로 가기위해 군인들에게 시집을 많이 갔으며 상대적으로 남성들은 멧멧제 령을 통해 들어온 여성들과 선을 보게 되었고 선을 본 여성은 눈,비 가 오거나 출입기간이 경과되면 제때 나가지 못해 선본 남자가 마음에 없어도 몇 일을 묵다보면 정이 들어 그대로 시집을 오게되었습니다.
또한 이곳에 사는 청춘 남녀가 서로 좋아 사랑을 하며 결혼을 약속하고 부모님께 승낙을 받고자할 때 한쪽 부모 또는 양가 부모님이 심하게 반대하여 결혼을 할 수 없을 경우 이 멧멧제를 넘어 외지에 갔다 오면 결혼승낙을 해주었다고 합니다 이래서 이 고개를 사랑의 고개라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5)해안사람의 삶을위하여

해안주민이 1956년도 입주해보니 전쟁중으로 마을은 폐허가 되고 논 경지는 황무지로 변해 있엇습니다. 처음에는 텐트 속에서 생활하다 군부대에서 현리와 오유리에 집을 지어주어 삶의 보금자리를 마련하였습니다. 점차 주민들이 들어나자 각자 집을 더 짓게 되어 마을은 커져 갔습니다. 농경지를 개간할 때 옛날에 저지대에는 물이 차서 곡식이 되지 않아 해발 600M 고지선 밑으로 내려 개간을 했습니다. 전쟁이 남긴 포탄과 고철을 치우며 제대로 먹지도 입지도 못하며 열심히 황무지를 개간 하여 곡식을 심어고 주기적으로 흉년이 들어 먹을 것은 항상 부족했습니다.
해안주민은 농사를 지으면서 전쟁이 남긴 고철과 탄피 등을 캐서 곡식을 마련하였으며 고철이 없어지자 산과들에 생약초 를 체취 하여 생활 하였습니다. 해안 사람의 생존을 위해 고물과 탄피를 캐다, 약초를 체취하다, 개간을 하다. 땔감을 하다 지뢰 사고로 30~40명이상 피해를 입었으며 한가정은 3대에 걸쳐 4명이 피해를 보기도 하였습니다. 지금도 산과 들에 지뢰가 있으며 몇 년에 한번씩 지뢰 사고가 발생하고 있으니 길이 아닌 곳으론 다니지 마세요. 지금은 정부의 지원으로 주택 개량도 많이 하였으며 농업기반시설 확충으로농업기계화는 물론이며 특용 작물로 화훼, 과수재배, 인삼재배 등 농가 소득을 높이고 있습니다. 이 마을에는 농업 인력 부족으로 외국인 300명을 포함하여 600명 이상 농업에 종사하고 있습니다. 젊은 사람이 많이 살고 있어 살아 있는 건실한 농촌이며 앞으로 남북통일의 중심 마을로 자리매김 할 것입니다.



아우산 또는 와우산 이야기

아주 먼 옛날에 이 산 밑에 아담한 초가집을 짓고 두 형제가 사이좋게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달이가고 해가 가 새봄이 돌아와 농사일을 열심히 하고 있던 어느 날 두 형제가 집에서 떨어진 반대편 밭에 가서 일을 하고 있었는데 필요한 쟁기(도구)를 가져오지 않아 동생이 쟁기를 가지러 집에 갔을 때 형수가 점심을 준비하여 일하는 밭으로 가기위해 머리에는 밥그릇을 이고 손에는 물그릇을 들고 집을 떠나던 차 갑자기 옷고름이 풀어져 아우인 시동생에게 옷고름을 메어달라고 부탁을 하여 형수의 옷고름을 매어주었다. 이때 반대편에서 일을 하던 형님이 이 광경을 보았다 먼 곳에서 보니 처와 동생이 형 몰래 사랑을 하며 키스하는 것으로 본 것이다.
형이 화가 나서 집에 와 동생을 들고 있던 쟁기로 아우를 쳐서 죽였다. 나중에 부인에게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자신의 무모함을 후회 하였으나 이미 동생은 저 세상으로 떠나간 후 였습니다. 억울하게 죽은 아우를 양지 바른 곳에 잘 묻어 주고 명목을 빌었다 그 후 이산을 아우산 이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또한 이산은 높은 곳에서 살펴보면 소가 편안히 앉아 있는 것 같은 형상을 하고 있어 와우산 이라고도 불리고 있습니다. 왜 가칠 봉 일까? 금강산의 일만이천봉을 정할 때 한 개의 봉이 모자라 지금의 봉을 첨가한다는 뜻에서 한자로 더 할 가를 사용하게 되었고 칠( )자는 봉 밑에 훈장 터(서당방) 라는 글방이 있었다고 한다 이곳에서 선비7명이 훈장 밑에서 지혜와 용기를 배우고 과거 응시를 위해 학문에 열중 하였으며 한양에서 과거가 있어 시험을 보게 되었는데 뜻밖에도 7명 모두 과거에 합격하여 훌륭한 선비가 되었다고 한다 과거 급제한 7명의 공을 기념하기위해 칠자를 써서 가칠 봉이라 부르게 되었다.




해안 신 효자 유래

조선말기 고종 황제 중엽때의 일이다 양구군 해안면 후리 신 석구라는 분이 노모을 모시고 어려운 가정 형편에도 불구하고 극진한 효를 행하며 살고 있었다 예로부터 효자는 하늘이 낸다고 하였다. 그래서 그런지 그는 부모님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쳐 봉양하였는데 하늘도 감동하였는지 만물도 그를 도왔다. 해안면 자월천과 이현천 합수 지점에 큰 호박돌이 물속에 있었는데 그곳에 나가 그 돌을 흔들면 큰 열묵어 고기가 잡혔다. 그는 매일 부모님께 고기반찬을 해 드렸다.
이 소문이 퍼지자 다른 사람들도 고기를 잡기위해 돌을 뒤졌지만 고기는 잡히지 않았다. 심지어 욕심이 많고 성격이 고약한 사내는 고기가 나오지 않자 아예 그것을 없애버렸다. 그것도 모르고 신 효자는 고기를 잡으러 그곳으로 갔다 신 효자는 돌이 보이지 않자 다른 돌을 물속에 넣고 고기를 잡기 시작 했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큰 열묵어가 잡혀 계속 부모님께 고기반찬을 해 드릴수가 있었다. 아버지가 연세가 많아 병이 들어 자라에 눕게 되자 정성을 다하여 간병을 하던 중 아버지는 아들에게 소고기가 먹고 싶다고 하였다.
당시 가난하여 돈도 없고 또 고기를 구하려고 해도 먼 곳(양구나 인제)에 가야 하는데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자기의 넓적다리의 살을 베어 요리를 한 후 소고기라 하면서 아버님께 대접해 드렸다.
그런 후 아버지는 운명하여 묘지를 해안면 후리 946번지에 모시고 그곳에서 3년간 묘지 관리와 아버지를 위한 모든 정성을 다하였다. 당시만 해도 해안 전 지역이 산림이 우거져 호랑이가 많이 있었으며 특히 묘지 옆에 큰 호랑이가 자주 나타나곤 했다. 산속에서 3년 상을 마치고 집에 내려와 농사를 지으며 생활하던 중 그 다음해 아버지 제삿날이 돌아와 제사상을 밤10시서부터 준비하는데 고기가 빠져 있어 걱정을 하고 있을 때 집 앞에 큰 호랑이가 나타나 등에 타라는 시늉을 하여 자세히 살펴보니 산 속에서 3년상을 치를 때 종종 나타난 바로 그 호랑이였다 신 효자는 호랑이를 타고 양구읍에 가서 고기를 구입하여 아버지 제사를 잘 지낼 수 있었다.
이런 소식이 퍼져 고종 황제의귀에도 들어가게 되었다. 고종 황제는 신하로 하여금 효자 상을 내리게 하였다. 그후 신효자도 나이가 들어 세상을 떠나자 그 손자인 신종균이 효자 상장을 보관하다 6.25때 분실하였으며 그의 손자는 이곳 해안면 현3리2반에 거주하다 1995년 12월 25일 사망하였습니다.




길장군에 대한 유래

강원도 양구군 해안면 월산리395번지에 길씨라는 한 농가가 있었다. 이 농가의 가족 중 아들 한명이 7~8세가 되도록 문 밖 출입을 안하고 밥만 먹고 잠만 자고 있었다. 어른들이 낮에 들에 나가 일을 하는 바람에 길장군 (아들)혼자 있을 때가 많았다. 어머니께서 일할 때 먹으려고 두부5되 분을 저녁에 해 놓고 다음날 아침에 부엌에 나가보니 두부가 모두 없어진 적이 있으며 또 엿을 해서 선반위에 놓아 두었는데 이것도 원인 모르게 없어진 적이 있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정월달이 지나고 2월 초가 되자 아버지가 월산리 가래골에 가서 큰 소나무를 잘라 소?(여물통)을 파 놓고 집에 가져갈 것을 걱정하였다. 밤이 되자 가족이 모두 잠을 자고 있을 때 길장군은 아무도 보지 않는 시간을 이용해 소?를 집에 갖다 놓았다. 이것은 장정 7~8명이 힘을 모아야 겨우 들 수 있었다 날이 밝아 마당에 나가보고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마을 사람들에게 누가 갖다 놓았는지 알아보았지만 아는 이가 없었다.
또 며칠 후 품앗이로 땔감 100여 짐을 산에 해놓고 집으로 가져갈 것을 걱정 하였으나 이것 역시 다음날 집 옆에 가지런히 쌓여 있었다. 어머니가 밭에 나가 일을 하다 몸이 아파 도저히 일을 할 수 없어 집에와 보니 방에서 아들이 자고 있었다. 그런데 아들을 보니 양쪽 겨드랑이 밑에 조그마한 날개가 달려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어머니는 만들어 놓은 두부와 엿이 없어진 것 또 소?와 땔감을 옮긴 것을 아들이 한 것이라 눈치 채고 남편이 돌아오자 이 사실을 이야기 하게 되었다. 남편은 아들의 괴이함을 협의코자 문중 회의를 소집한바 관청에 신고하게 되었다. 그때만 해도 장군이 나면 역적이라 하여 3대를 멸종 시킨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관청에서 죽이라는 명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아들을 죽이게 되었다.
길장군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자 갑자기 용마가 나타나 크게 울다 죽고 말았으며 마을 사람들은 어린 길장군의 시체를 거두어 해안면 월산리 377 번지 옆에 잘 묻어 주었다. 일제시대에 일본 사람이 이 사실을 알고 이 지역에서 또 장군이 날것을 막기 위해 묘지 주변 산에 쇠말뚝 을 박았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아직 찾지는 못하고 있다. 지금도 월산리에 가면 길장군 묘가 있는데 주변에 잡초만 쓸쓸하게 바람에 흔들리고 있으며 지나가는 사람마다 저 곳이 길장군의 묘라 말하고 있다.



용늪

대암산 해발 1300M 정상 지점에 약 10,000여평 정도 되는 고층 습원으로 3개의 소 물이 고인 작은 연못 비슷한 소(연못)가 있습니다 이곳에서 용이 하늘로 승천하였다 하여 용늪이라 하였다. 그 후 이곳 주위에 명당이라는 설이 있어 자손이 잘되기를 소원 하는 일부 사람들이 야밤을 이용 시체를 몰래 묻는 투장 사례가 실제로 있었으며 여름에 투장을 하면 비가 계속내려 엄청난 장마로 양구군 동면 해안면 인제군 서화면 주민들의 농사를 헤치게 되어 지역 주민들이 그곳에 가서 투장한 시체를 파헤친 사례가 6,25 직전까지 있었는데 그것(시신)을 파내면 비가 와서 깨끗이 쓸어 갔다고 한다.
30~40년 전 가뭄이 심할 때는 해안, 동면, 서화면 주민들이 모여 개를 잡아서 이 소에 던지면 용이 노하여 비를 뿌린다 하여 기우제를 지내기도 하였다. 특히 이곳은 천연기념물 제246호로 지정된 한국 유일 산머루 습원지로 각종 히귀 동, 식물이 서식하고 있어 자연 생태 보호지역으로 관리 하고 있으며 세계 유네스코 지정을 추진중에 있습니다.



도솔산 산신제

도솔산 산신제는 정확한 년도는 알수 없으나 조선시대부터 현재까지 전해오는 행사이다. 제단은 도솔산 준령 남쪽 하단 계곡 (산림청에서 조성하는 국립 DMZ 자생 식물원) 상단 지역이 됩니다. 해안면을 수호하고 있는 도솔산 산신령은 여성으로 제를 올릴때는 황소를 잡아 지역 주민이 정성껏 드리고 있으며 여성의 접근을 금하고 있습니다. 산신제는 매년 4월 1일에 거행하고 있으며 주요 내용으로는 면민의 무명장수 와 지역 번창, 풍년농사를 기원합니다. 후속 행사로 개인의 소원과 농악 및 사물놀이 등 다체로운 행사를 하고 있습니다.
질고개 또는 돌산령에 대하여 아주 먼 옛날에 해안에 살고 있던 한 부인이 험준한 돌산령을 걸어서 양구에 가서 일을 보고 혼자 집으로 걸어서 오던 중 동면 팔랑리에 도착하니 해가 어느덧 서사에 기울고 있었다. 당시에는 차가 없어 걸어서 다니면서 모든 일을 보던 시대이다. 때는 여름철이고 날씨가 더워서 속옷을 벗고 흰 옷 치마만 걸치고 걸음을 재촉하며 걷다보니 산 정상 부근에 이르렀을때 갑자기 큰 호랑이가나타나 사람을 잡아먹을 기세로 달려들려고 할 때 너무나 겁이 나서 입고 있던 치마를 뒤 집어 쓰고 기절하다 시피 하였답니다. 이때 이 여인은 달거리(월경) 시작되어 흰 치마에는 붉은 피가 여기저기는 물론 사타구니에도 묻어 있었으나 무서움과 두려움으로 이런 상황을 모르고 있었다. 호랑이가 생각하기를 피 묻은 흰 보자기를 뒤집어 쓴 것이 사람도 아닌 것 같고 무엇을 잡아먹었는지 입 주변에도 묻어 있었다.
나도(호랑이) 저 괴물에게 물려 죽지 않을까 겁이 나서 호랑이가 도망을 갔다 한 참 만에 정신을 차려 해안 집으로 늦게 돌아왔다. 기다리고 있던 가족과 동네 사람들이 왜 늦었냐고 묻자 돌산령 정상 부근에서 호랑이가 나타난 사실을 말했다. 위급한 상항에 달거리가 시작된 것이 자신을 구한 것이라 하자 그 후 동네 사람들이 이 고개를 질고개 또는 돌산령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남근석에 대한 이야기

해안면 후리에 후동이란 마을이 있습니다. 이 마을에는 아기가 태어나면 여자 아기가 더 많이 태어났다. 당시에는 남자 선호 사상이 강했으며 모든 가정에 대를 이어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여자 아이가 커서 시집을 가면 반드시 아들을 낳아야 가정이 편안하고 그렇지 않으면 심한 시집살이에 많은 고초를 격으면서 살아야 합니다. 유달리 딸만 많이 낳는 이 마을에 아들을 낳아 가정의 평안과 대를 잇기 위해 마을 사람들이 일심동체가 되어 마을 부근에 사당을 짓고 남근석을 세웠다.
그 후 아들을 낳지 못하는 아낙네가 이곳에 와서 남근 석을 만지며 빙빙 돌면서 아들 낳기를 소원하여 아들을 낳았다고 합니다. 이런 소문이 퍼지자 해안에 살고 있는 여성은 물론 타지역 여인들도 와서 소원을 빌었다고 합니다. 일제 해방과 동시 북한 지역 편입과 6,25 전쟁으로 폐허가 되어 망가진 것을 1988년도 해안면사무소 옆에 다시 남근석을 복원 하였습니다. 1994년도 또 하나의 남근석을 면사무소 앞에 설치 하였는데 생각지도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면사무소 주변 150M 내에 심어 놓은 나무의 껍질이 갈라지고 상처가 생겨 정상적인 나무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MBC기자가 취재를 하여 방영한바 있습니다. 남근석만 있고 여근석이 없어 남성의 기가 너무나 강해서 나무가 갈라진게 아닌가 합니다. 이 방송을 듣고 어떤 분이 가지고 있던 여근석을 면사무소에 기증 하여 남근석과 여근석 을 결혼을 시켜 해안면 오유1리 물레방아 옆에 설치하였습니다. 남극석의 영향인지 모르나 해안 지역은 여성보다 남성이 더 많으며 특히 농촌총각이 많아 결혼에 어려움이 있었으나 남근석 여근석 결혼식 이후에는 외국 여성들과 결혼으로 다문화 가정이 늘면서 농촌 총각 문제도 점차 해소되어 가고 있으며 남, 여 의 출생 비율도 같아지고 있는 추세입니다. 지금도 아들 낳기를 원하는 아낙네가 남근석에 와 남몰래 빌고 간다고 합니다.



장군바위

옛 날 옛날 한 옛날에 조용하고 아담한 해안 마을에 하늘에서 흰 말을 따고 거대한 장군이 내려와 바위에 앉으며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이곳에 온 것은 기근(가난)을 해결하기 위해 좁쌀 씨앗을 가져와 이것을 심어 가난도 극복하고 군량미로 확보하여 나라를 튼튼히 하고 외세 침략에도 대처할 계획이니 내가 이곳에 온 것을 비밀로 해 달라고 간곡히 부탁하였다. 하지만 한 여인이 이 사실을 발설하자 장군은 내가 이곳에 머물 수 없다하며 다른 곳으로 떠나가고 말았다. 장군이 앉아 있던 바위에는 발자국과 도포를 입고 앉아 있던 자리가 지금도 선명하게 나타나 있다. 이 바위는 해안 면 현리148번지에 잘 관리되고 있으며 구전으로 전설처럼 전해지고 있는 장군바위라고 합니다.



펀치볼 지구 안보관광지

해안에는 안보관광지가 있는 곳입니다. 년 간 약 150,000명 이상이 방문하고 있습니다. 1990년 3월 3일 발견된 제4땅굴과 을지전망대 전쟁기념관 통일관이 있습니다. 제4땅굴은 산 밑의 지하 145M 깊이며 폭과 높이가 1,7M이며 총길이는 북쪽 에서 남쪽까지 2052M이고 군사분계선에서 남쪽으로 1028M를 불법 남침을 강행하면서 굴착되었으며 역 갱로는 340M로 우리 군이 독일제 장비로 굴착하였다. 땅굴을 발견하고 우리군이 군견을 앞세워 정찰하던중 800M전방에 북한군이 목함 지뢰 설치한 것을 군견이 밟아 죽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7~8명의 인명 피해를 막았으나 군견은 산하 하였으며 그 뜻을 기르고자 당굴 입구에 컨트라는 군견 동상을 설치 하였습니다.
을지전망대는 1988년도 전경련 회장단에서 건립되어 현재까지 운영되고 있습니다. 을지전망대는 해발 1049M 높이에 있으며 이곳에 오르면 북쪽에 있는 금강산과 남쪽에 있는 대암산, 향로봉, 설악산, 해안분지를 한눈에 볼 수 있으 며 북한군들이 농사짓는 모습을 육안 및 만원경을 통해 직접 볼 수 있습니다. 특히 가장 가슴 아픈 사연은 군사 분계선을 가운데 두고 남방한계선 북방한계선을 그어 놓고 같은 동족끼리 철조망을 쳐놓고 총부리를 겨누며 오고가지를 못하고 있는 분단의 현장을 직접 체험 할 수 있는 곳입니다. 전쟁기념관은 2000년 6월20일 건립하여 양구의 9개 지역 전투상황과 영상물을 볼 수 있으며 전쟁의 유품, 전투장비는 물론 전사자 명단까지 보실 수 있습니다.
통일관은 1996년 8월 14일 통일부로부터 지원받아 개관 되었고 북한의 정치 경제 문화 사회상을 패널로 통하여 변천 모습 등을 볼 수 있으며 우리 대한민국의 발전상을 비교분석 할 수 있다. 북한의 생활용품 전시와 남북공동생산 품목등도 전시되어 있습니다. 북한을 알고 이해하며 우리가 대처해 간다면 멀지 않는 장래에 통일은 꼭 이루어지리라 확신합니다. 앞으로 여러분께서 시간이 있으시다면 꼭 안보관광지를 탐방하시기 바랍니다. 출입 절차는 통일관에서 출입확인서를 발급받아야 되며 매주 월요일은 휴관입니다. 참고하세요.



해안지구 주요 전투 전적지

양구는 강원도 동북방 최대 격전지로 6,25때 치열하게 전투를 한곳입니다. 양구지구 9개전투를 승리하여 본 지역을 수복하였으며 특히 해안지구 전투로는 도솔산지구 전투 대우산지구 전투 가칠봉지구 전투 펀치볼지구 전투등 양 구 9개 전투 중 4개 전투를 해안에서 감행하였습니다.
도솔산 지구 전투는 1951년6,4 ~ 6,20(17일간) 실시되었으며 도솔산 일대는 태백산맥 중 가장 험한 산악지대로서 1,000M이상 고지로 중첩되어 있어 미 해병과 탈환을 시도 하였으나 탈환하지 못하고 우리 해병대가 교체되어 환전 탈환한 고지입니다. 당시 이 승만 대통령은 이 고지를 탈환한 해병대에게 무적의 해병대라는 시호를 붙혀 주었다.
대우산 지구 전투는 1951,7,8 ~ 7,31 (24간일) 실시되었습니다. 도솔산 지구 승리의 여세로 미군, 네널란드, 한국군과 연합하여 대우산을 점령하게 되었다. 대우산 앞으로 연결된 피의 능선지구 전투, 단장의능선 전투에서도 승리하였습니다. 가칠봉 지구 전투는 1951,9,4, ~ 10,14,(40일간) 실시된 전투로 주간에는 우리군이 점령하고 야간에는 북한군이 점령하면서 주인이 6번이 뒤 바뀌는 혈전 끝에 우리군이 점령하였다. 이 마을에 살던 주민들이 가칠봉 전투때 탄약을 지고 올라가 전투를 지원하기도 하였다. 이 전투 승리로 펀치볼을 확보하는 계기가 되었다.
펀치볼지구 전투는 1951,8,31 ~ 9,20.(21일간) 실시된 전투이다 휴전회담이 제기된 이후 전투력을 제 정비한 인민군 제2군단이 펀치볼을 사수코자 하였으나 한, 미 해병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포병 및 근접 항공지원 사격을 지원 받아 3주 동안 치열한 혈전을 벌인 끝에 펀치볼과 주변 고지들을 확보하였다. 펀치볼 지구 전적비를 통일관 우측에 설치하였으며 좌측에는 전쟁기념관를 세워 양구지구 9개 전투사 및 유품등을 전시하고 있으니 시간이 되면 관람하시기 바랍니다.



펀치볼 선사유적지

이 정자각이 세워진 곳이 펀치볼 선사 유적지가 되겠습니다. 구석기 시대부터 철기시대에 이르기까지 사용하였던 점토대토기, 돌칼, 돌화살, 불탄 주거지, 고인돌이 발견되어 강원도 문화제 자료 제133호로 지정관리 하고 있습니다.



해안을 지킨 방공자치대
6,25전쟁당시 1950년 10월 중순경 백골부대가 양구 을 탈환 했다는 연락을 받고 해안면 현리 동네 청년 21명 ( 조환철 오해용 조환주 허봉율 이병은 안영주 김재덕 이광훈 정태식 이광익 김두연 김창환 정재원 홍성철 한석두 우창정 한재호 한재명 남광택 김학태 최봉철) 이 화합하여 반공자치대를 조직후 명주3필을 구입하여 태극기를 만들어 각 가정에 배부하고 태극기 앞에서 북괴군 격침과 해안 치안을 위해 전력투구할 것을 맹세하고 활동하다 북괴군 빨치산대에 5명(조환주 이광훈 김창환 홍성철 최봉철)이 검거되어 지금이 해안 초등학교 앞에서 학살 되었다. 지금도 해안 주민은 확고한 국가관과 안보의식이 타지역 보다 강하다고 말할 수 있다.



해안 (매동) 초등학교의 항일교육

해안지역에 초등학교가 1곳 있읍니다 이 해안초등학교는 1933년도에 매동 심상소학교로 설립되어 80여년 역사를 지닌 학교입니다, 1937년부터 1940년까지 교사로 근무하던 홍순창이는 학생들에게 민족정신 함양과 올바른 국가관을 뿌리 깊게 심어 주었습니다. 당시 일본 교과서에는 일본 신공 황후가 신라와 백제를 정벌한 후 식민지화 했다고 했는데 이 같은 허위사실을 폭로하면서 올바른 한국사를 교육시켜 왔습니다 이때부터 학생들은 일본인들에 대한 증오심이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김원섭 교장 후임으로 일본인 구보일랑 교장이 오면서 일본인 배척운동이 더욱 심화 되었고 구보교장이 담당한 시간만 되면 학생들이 잘배우지 않는다하여 퇴장을 시키는 수가 한 두번이 아니 였다고 합니다.
학생들 간에 일본 배척운동이 싹트고 있을 무렵 매동 심상소학교에서는 실습용으로 닭을 기르고 있었는데 어느 날 닭 한마리가 없어진 것을 찾아보니 구보 교장집 아궁이에서 닭털이 발견되었다. 교장이 잡아먹은 것이 확인되자 학생들이 모여 논의 한 후 백지에 “닭 도적 구보교장한테 배울 것이 없다. 일본인 구보교장은 물러가라”라고 써서 학교게시판에 붙여 놓았다. 구보교장이 이 사실을 노발대발 하면서 경찰서 주재소에 연락하여 주동자인 원 원규가 연행되어 조사 및 고문을 받았으며, 1940년 6회 졸업식 사은회 석상에서 학생들이 조선 노래를 부르자 구보교장이 중지 시킨 일이 일어났다.
학생들은 격분한 나머지 사은회가 끝난 후 “타도일본 조선독립만세” 라고 칠판에 써놓았다. 홍 순창교사가 학생들을 선동하고 조종한 것으로 알고 홍 교사를 체포하여 혹독한 고문을 받고 1941년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2년의 언도를 받아 복역 받았고 주동학생인 원 원규는 만주로 도끼 하였으며 나머지 10명의 학생들도 경찰에 연행되어 조사와 고문을 당했다. 이 후 해안주민도 독립 운동에 적극 동참하게 되었다.



황용과 청용에 대한 이야기

황용은 대암산 1300M 늪지대에서 주변 높은산 과 양구군 해안면, 동면 그리고 인제군 서화면등 3개 지역을 수호 하였으며 청용은 해안면 후리 지역인 해 안 초소 뒷산 늪에서 해안 지역과 호수를 수호하였습니다.
당시 해안은 해발500M 내 물이 가득찬 호수였다. 해안지역의 기각 변동과 대홍수로 호수가 터져 물이 빠지자 이곳을 물골이라 부르게 되었읍니다. 때마침 황용과 청용은 하늘로 승천하였고 대암산 늪에서 승천한 곳을 용늪 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사람이 죽어 시체를 이 용늪에 수장하게 되면 후손들이 벼슬을 얻어 부귀영화와 무병장수를 한다 하여 남몰래 야밤에 수장한 사례도 종종 있었다고 합니다. 또한 청용이 승천한 곳을 청용안 이라고 지금도 부르고 있습니다. 이곳은 현재 장기간 토사유출로 늪지대 원형은 잃어가고 있으며 버드나무만 무성하게 자라고 있습니다.
청용이 승천한 끝자락이 명당자리라 하여 조선말기에 양구군에서는 이곳에 해안면사무소를 건립하여 일제 말기까지 해안지역의 발전을 도모하였습니다. 해방과 동시 이곳이 북한지역에 편입되었다가 6,25전쟁 이후 우리군에 의해 수복되어 1956년도 주민이 입주하여 살아가고 있습니다. 현재는 옛 해안면사무소 자리에 군부대 초소가 주둔하고 있어 해안주민을 보호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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